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난의 행군 (문단 편집) == 파멸적인 결과 == >(전략)...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1994년 8월의 대홍수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8월은 농작물이 숙성하는 시기인데 어느 하루도 그치지 않는 비로 하여 그나마 물에 잠기지 않은 농작물도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대홍수는 [[김일성 암살설|김일성의 암살설]]로 비화됐습니다. 김일성이 후계자이고 아들인 김정일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북한에 재앙을 불러왔다는 설이었는데 이러한 설은 주민들 속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비록 농사는 망쳤지만 전쟁예비물자로 저축한 식량이 많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농사가 안 돼 전쟁예비물자를 다 털어 먹었다는 사실을 당시 북한의 인민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농사는 망쳤지만 [[아편]]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었습니다. 도시 노동자들의 배급이 끊기고 인민들이 느끼는 식량난이 커가고 있었지만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을 심는 자신들만은 나라에서 정상적인 배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 >아편의 진은 8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채집을 했습니다. 아미산 총국은 아편을 생산하는 기간인 8월 달까지 청림리 주민들에게 배급을 주었습니다. 생산된 아편을 다 거두어 갔을 때 이곳 주민들은 곧 ‘우대상품’이 차례지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아편이 잘 되었으니 양복지나 대동강 텔레비죤(TV)과 같은 ‘우대상품’의 가짓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대상품’은 커녕 9월에 받아야 식량조차 공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 >이곳 [[아편|백도라지]]농장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수십 리도 넘는 [[량강도]] 농촌경리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양정과를 쉼없이 오가며 청림리 주민들의 배급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 >군 당위원회를 찾아가 “중앙에서 아편을 거두어 갔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가 김상원은 직무정지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초급당 비서까지 직무 정지되다 보니 주민들의 배급을 위해 뛸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림리 주민들은 국가배급에 매달려 뙈기밭 농사를 포기했던 자신들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굶주린 주민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가축]]들을 마구 도둑질하고 축산작업반을 습격해 농장에서 키우던 [[양(동물)|양]]과 [[소]]까지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 >이런 가운데 1994년 10월 9일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제6작업반에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된 어린이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가 함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목을 매 숨졌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던 10월 굶주림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농사를 지어 ‘우대상품’으로 받았던 텔레비죤(TV)과 고급양복지를 헐값에 팔아먹었습니다. 심지어 돈이 된다면 늄([[알루미늄]])으로 된 밥 가마까지 팔아먹었습니다. >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량강도 무역국과 교섭해 이깔나무 30입방을 주고받아 왔다는 것이 포장지에 소와 양의 머리 그림이 있는 사료용 [[옥수수|강냉이]] 1톤 680kg이었습니다. 통나무 1입방 당 사료용 강냉이 56kg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식량은 통나무를 베어내는데 동원된 농업노동자들과 젖먹이 어린이가 있는 가정들에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청림리 6백 세대의 가정들에 800그램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800그램의 식량은 한 가정이 한 끼 먹을 량도 안됐습니다. > >1994년 10월말에 청림리에서 노약자들과 늙은이들을 비롯해 가정세대 7개가 멸족했습니다. 청림리의 식량위기는 보천군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현장을 방문했지만 군수예비물자까지 다 털어먹어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해 눈 내리는 12월, 김상원 초급당 비서는 늙고 병든 몸을 끌고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작업반장들을 불러냈습니다. 작업반장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일일이 두드려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인기척이 없는 집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 >농장에서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 굶주린 주민들에게 뜨거운 물을 끓여 나누어 주는 자원봉사도 조직했습니다. 또 농장 진료소에서 비상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아편을 량강도 무역국에 주고 강냉이 가루 2백여kg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강냉이 가루를 1kg을 큰 밥솥에 넣고 끓여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1994년 12월 청림리에서 대량아사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가정은 누가 살고 누가 죽는다는 순서가 없었습니다. > >먹을 것이 없는 가정은 온 집안 식구가 통째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몰래 보관하던 아편까지 다 팔아 보았지만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식량이 없는 가정에 오늘 쌀 1kg을 가져다주면 그들의 죽음을 하루 정도 더 늦추어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1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청림리를 떠나는 14살 소녀와 10살 되는 그의 남동생에게 김상원 초급당비서는 닦은 강냉이 한줌과 손톱눈 크기의 아편을 쥐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초급당비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 >그 아편이 고향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식량이 될 수 있음을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월의 강추위 속에 “여러분 물을 끓여 마십시다”라고 소리치며 눈보라를 헤치던 김상원 초급당비서의 목소리는 큰 동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량강도 당위원회의 지시로 도농촌경리위원회 수출원천동원사업소에 통나무를 팔아 청림리 주민들을 살릴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눈이 녹는 3월, 몇 백 키로그램의 강냉이가 지원됐지만 이미 마을주민들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후략) >----- >-당시 [[량강도]] [[보천군]] 지역의 참상에 대한 탈북민의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09122017093553.html|증언]]. ||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5-00_01202816.jpg|width=100%]] || ||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고난의 행군 시기 참상[* 물론 MBC 기자가 실제로 북한에 가서 취재한 건 아니고 미국 [[CBS(미국 방송)|CBS]] 기자가 취재 및 촬영한 것을 가져온 것이다.] || [[1997년]] [[10월 2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이 [[미국]] [[CBS(미국 방송)|CBS]] 뉴스에 방영되며 전 세계에게 큰 충격을 줬다.([[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78312|KBS]],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974673_30717.html|MBC]]) 당시 [[북한]]을 취재한 기자 피터 밴 센트는 [[북한]] 인구의 5분의 1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하며, 북한을 돌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촬영하였다. 북한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22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지만 [[황장엽]]의 회고록[*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 첫 해에 100만 명이 죽어나갔고, 이후에 추가로 100만 명이 더 죽어나갔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3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 150만, 많으면 350만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는 360만 사망설을 적고 있었다. 그러나 황장엽은 학자 출신으로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300만 이상은 근거가 부족하다.]을 근거로 300만이 굶어 죽은 것으로 주장했다.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결과로 추정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는 의외로 북한 측주장에 가까운 약 30~40만 명이다. 물론 그래도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 당시 인구 17만 명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다. 다만 이러한 과거 추계는 북한의 공식적인 인구 조사 발표를 신뢰한다는 가정하에 세운 것으로 현재에는 그 추정치의 기반이 되는 북한 인구 자체 발표가 불신을 받는다. 실제로 북한의 통계 자체는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므로 북한 인구는 북한사람도 실제로는 모른다. 인구통계는 중앙당 간부 중에서도 고위직이나 해당 분야 정책 실무자나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 [[https://www.dailynk.com/20210625-3/|北 인구통계 입밖에 꺼낸 기요연락소 소장, 결국…[북한 비화] 2019년 '1호 지시'로 실내 처형]] 한편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는 아사자를 100만 명 미만을 주장하는데 300만 명 이상 사망하려면 1000만 명 이상이 신체적 정신적 불구가 되기 때문에 300만은 가능한 수치가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주기자는 북한 인구를 500만 정도 부풀린 약 2,050만으로 추정한다. 이 수치대로라면 1990년대에도 상당수의 통계조작이 있었고,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추산한 한국 통계청과 국제사회의 추계치도 상당부분 실제를 반영하지 못한다. 2021년 초 북한 외교관 출신 김동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NISS) 수석연구위원은 당시 실무자로[* 북한 외무성 국제기구국 유엔과 책임 연구원을 4년 하다가 1994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때 부터 1998년 탈북 할때까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유엔식량농업기구([[FAO]]), 국제 농업 개발 기금(IFAD)가 위치한 이탈리아 2등서기관으로 발령 받아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국제사회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구걸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국제 사회 식량지원 업무를 담당했다고 밝히며 [[배나TV]]에서 1994년 북한 외무성 1부장 [[강석주(북한)|강석주]]가 김정일에게 제의서로 약 50만 명이 이미 아사했고 더 많은 아사자가 예상된다는 내용의 식량부족을 보고 했고, 북한에서 국제사회에 피해롤 호소하며 밝힌 사망자수는 80만이나 실제로는 10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또한 김동수 박사도 북한 공식 인구 통계에 대해서 발표되지 않은 내외부의 자료를 기반으로 실제 북한 인구 추정치는 북한의 공식 인구보다 최소 100만에서 200만정도 적다고 밝혔다. 서울대 사회학과 박경숙 교수도 또한 북한 통계를 신뢰할 수 없다고 보며 북한이 발표한 자료는 여러 면에서 체계적인 오류가 있다고 의심한다. 인구 손실은 300만보다 훨씬 적은 90만 정도로 예상했다.[[https://kosis.kr/bukhan/nkAnals/selectNkAnalsDetail.do?menuId=M_02_01&pageIndex=2&boardIdx=12&searchCondition=00&searchKeyword=|통일부 북한통계 해설자료]] 하지만 인구의 5%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비교하자면 북한 공식인구가 1993년 기준 2,100만 명이고(실제로는 더 적었을 가능성도 높지만), 아사자는 현재 추정치론 100만 명 내외이니 당시 북한 인구 약 5프로가 굶어죽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간신히 먹고는 살던 1970~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북한 성인은 그래도 허우대가 비교적 좋은 반면, 고난의 행군 이후 출생자들은 키와 체격이 아주 왜소하다. 2006년 11월 21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 남북한 키 차이는 남자 6.9, 여자 4.2cm가 됐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513461#home|참고]]) 이 때의 청소년들은 성장이 매우 느려서 탈북 관련 TV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 한국의 10대 전반 초등학생과 비슷하였고, 10대 중반의 여학생은 아예 한국의 8~9세 정도의 성장을 보일 정도로 영양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북한 고아원 출신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외신 기자들이 북한의 고아원 등 아동 시설을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비쩍 말라서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의 아이들이 찍힌 것이 많았는데, 이런 아이들이 '''(북한 기준으로는)그래도 그나마 건강한 아이들'''이라고 해서 스튜디오를 경악시켰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즉 죽기 직전의 상태인) 아이들은 아예 사진은 고사하고 공개조차 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발육부진에 더해 임산부의 영양실조로 인한 기형아, 장애인의 발생률도 이 때 기점으로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이 들이닥친 덕에 노동가능 인구와 징병가능 인구가 충격적인 수준으로 급감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김정은]]도 이를 알고 있어서 북한군의 병력을 감축시키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대약진운동]]은 [[제사해 운동|세]] [[토법고로|가지]] [[치수사업|병크]]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으며 수습 또한 고난의 행군과 비교하면 단기간에 성공한 반면,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이런 엄청난 기근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해서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반 세기 동안 내부 자원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고 갉아먹으며 쌓여온 [[적폐]]가 마침내 폭발해 발생한 기근이니, 단기간 내에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북한이라는 나라 전체가 아사 직전이었다고 봐야 한다. 오죽했으면 고난의 행군 당시 70대 전후의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왜정]] 때보다 더 어렵다, 왜정때는 왜놈들은 쌀밥먹고, 우리는 잡곡이라도 먹었는데,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마저 권위는 유지했으나 실권을 크게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직전까지 전락할 정도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오직 외부에만 책임을 돌리고 사실상 정권 핵심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의 정치 체계가 정상적인 수준의 평가 기능은커녕, 최소한의 판단 능력조차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 때부터 [[북한]] 정권이 어떤 집단인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국 내 북한에 대한 환상은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깨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영양 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다. 성인에 진입한 9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크기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21년 현재 10~20대에 신장이 150cm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일제강점기때 함경도와 평안북도는 동아시아에서 평균신장이 가장 컸던 곳 1위였다. 나머지는 그냥 남쪽과 비슷했다.] 이들을 [[발육부진]] 세대, 미공급 세대라고 부른다. 출생자들의 낮은 신장으로 인하여 이들의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이 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대재앙은 북한의 [[교육]]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줬다. 이 시기를 겪은 아동들, 그러니까 1990년대 출생자들의 [[문맹]]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증가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절대 다수의 탈북 청소년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 정도까지는 과장이다. 출석률이 한때 25% 가량으로 떨어지기도 했으나 사람들이 장사를 하여 위기를 극복하였다. 한겨레학교에서 30명 남짓한 탈북 청소년들이 공부를 하는데, 그 가운데 1~2명 정도가 문맹자로 나왔다고 한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o_literacy-12292009104351.html|#]] 다만 문맹률이 0에 가깝다는 과거에 비하면 이 정도도 급격히 늘어난 것은 맞다. 당시의 북한 관련 통계를 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인데, UN 추산 1인당 GNI가 1989년 약 900달러 수준에서 1998년에는 500$수준으로 급감했고, 이후 2006년까지 900달러대를 회복하지 못했다. 2019년까지는 수치상으로는 대략 19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 상황은 상당히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주민들이 경제적 통제를 상당부분 무너트려 2010년대 후반에는 하루 세 끼 먹는 주민이 90%가량 된다는 조사도 있다. 탈북자 대상 조사지만 [[평양]] 출신이나 [[신의주]], [[평성]] 같은 잘 사는 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적기에 북한 전역의 수치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처음 언급한 1960년대보다 나은 부분도 있어 2010년대 후반이 군인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북한 역사상 가장 서민이 살기 좋다고 할 수도 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647413|#]] 하지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져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진 데다 사회 복지 제도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해 출세한 계층[* 예를 들면 [[조총련]]계 교포 출신들과 [[화교]], [[중국]]이나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 시장화의 혜택을 본 계층으로 손꼽힌다고 한다.]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군인, 농민, 군수공장 노동자는 오히려 국가에 얽메여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계층은 사경제로 인해 의외로 잘 산다. 2010년대 후반의 말을 들어보면 "결혼식 전문업체", "목욕탕"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사와 뇌물 등으로 주민이 방해를 이겨낸 것이다. 탈북자들은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탈북한 사람이 많고, 미디어에서도 대북제재 효과 같은 예외적 문제를 제외하면 식량지원이나 학정을 강조하기 위해 식량난을 과장시켰기에 이 시기의 북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한에 각인되었다. 정치인이나 식량을 지원하는 단체를 제외하고 경제만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업상 필요로 식량 수요가 과장되어 나타난다는 주장도 한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190518/95579551/1|#1]][[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693286625898480&mediaCodeNo=257|#2]] 그래서 일종의 북한 주민에 대한 혐오까지 조장되어 탈북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rfa_interview/rfainterview-03142021223901.html|#]] "북한 이탈 주민이면 당연히 어렵고,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는 1990년대 이미지가 일반 국민들한테는 크게 각인이 되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한 편견, 차별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고요."라고 주장한다. 북한 주민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경제 상황을 시장 경제로 나아지게 했는데 외부에는 이것이 잘 알려지지 않아 마치 가난해도 그것을 극복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2020년에는 군병력이 주는데도 신병 징집 기준을 6cm 높였다는 주장도 있다. 2006년만 해도 2025년에 차이가 더 벌어진다고 하였으나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https://www.dailynk.com/148cm-미만-병역-면제-2020년-달라진-北-초모-기준/|#]] 출산율을 감소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자신이 가난하기는 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가난한 것은 모르던 시대였다. 그냥 근대 국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정도로 여겼다는 것으로,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당시의 동유럽과 달리 출산율이 심하게 감소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경제성장을 빠르게 이룩하던 시기 출산율이 급감하고, 산아제한정책에도 호응도가 높았다. 북한에서 가장 빠르게 합계출산율이 감소하던 시기는 1970년대로, 이때 4명대를 기록하던 합계출산율이 2명대로 줄어들었다. [[https://newsis.com/view/?id=NISI20171215_0000082187|#]] 1995년경까지 감소를 하다가, 그 이후에는 거의 2명대 초반~1명대 후반인 정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몽골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출산율로, 탈북자들은 북한은 사회 안전망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가정을 꾸린다는 말을 한다. [[김정일]]은 이 처참한 결과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애먼 곳으로 돌리느라 급급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심화조 사건]]이었다. 1997년에 김정일이 정식 집권한 후 이듬해부터 '강행군'과 '구보행군'으로 변경했고, 2000년 북한은 [[조선로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2009년 화폐개혁|화폐개혁]]으로 알거지가 속출하여 이렇게는 못 산다고 집단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행군을 끝낸 것은 주민의 의지지 김정일의 대단한 정치적 수완이 아니였다.[* 김정일이 무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굶어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고난의 행군으로 인민들이 굶어죽어가는 와중에도 자기는 호화롭게 누릴거 다 누리며 미식을 즐겼다. 자기 딴에는 언감자와 줴기밥을 먹는다고는 했다만 그의 요리사로 일했던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완전 다르다. 거기다가 [[기쁨조]]라는 사실상의 후궁까지 끼고살았으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